1988년, 서울 올림픽의 불꽃이 타오르던 그해, 한국 경제는 눈부신 고도성장을 맞이하며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한국에서 자비유학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린 시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가 시행하는 엄격한 자격시험을 통과한 극소수의 인재들만이 국비유학의 날개를 달고 해외로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공별 유학시험의 높은 벽을 넘어야 했으며, 국가나 단체의 장학금이라는 든든한 돛을 달지 않고서는 바다 건너 꿈을 향해 항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로 들어서면서 환율은 달러당 650원이라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는 중상층 가정에도 유학이라는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첫 세대 유학생들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손에 넣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 각계각층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그들만의 기회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며 환율은 1,800원까지 치솟았고, 한국 경제는 큰 시련에 봉착했습니다. 많은 유학생들이 꿈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아픔을 겪었으며, 외화 낭비의 상징처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IMF 사태를 극복한 후,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한국 경제는 다시금 안정을 찾아갔고, 유학은 이제 더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생의 수가 늘어난 만큼 유학 실패의 사례들도 더 많아졌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조기유학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어린 초중등생들의 손을 잡고 머나먼 미국 땅으로 향하는 엄마들과 남겨져 유학비용을 벌아야하는 ‘기러기 아빠’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났습니다. 유학원이 소개하는 ‘좋은 학군’을 찾아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채로 떠난 엄마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었고 아이들은 엄청난 문화 충격에 휘말렸습니다. 큰 도시에서는 일부 조기유학생들이 무제한의 유흥문화 속으로 빠져들며 술과 마약의 늪에 빠져버렸고, 한국에 남겨진 아버지들은 가족을 위해 묵묵히 버텨내며 건강을 잃어가는 안타까운 현실도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대까지 이르러, 유학 실패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생활 환경 적응 실패로 인한 불안, 학업의 부담, 룸메이트와의 갈등으로 고통받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많이 불겨졌고, 특히 여학생들 중에는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경우도 더 많아졌습니다.
남학생들의 경우, 무분별한 유흥과 법적으로 허용된 마약에 쉽게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대마초 성분의 과자와 사탕들은 새로운 유행처럼 번져갔고, 이에 빠진 학생들은 학업을 잊은 채 쾌락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마약의 세계는, 점차 깊은 중독으로 이어져 많은 이들을 끝없는 암흑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도박의 유혹도 학생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친구들과 한 번의 즐거운 카지노 방문은, 영화 속 장면처럼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경험이었지만, 그것은 곧 파멸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카드 게임은 일상을 잊게 만들었고, 결국 많은 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탕진하고 말았고, 일부는 빚에 시달리며 범죄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습니다.
유학이라는 꿈이 가진 어두운 이면은, 때때로 안타까운 사연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한국과 미국을 잇는 유학의 다리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채널이 되고 있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런 문제를 빗겨갈 수 있는 미국유학 성공의 해결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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